선플기자단 3기 양정아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그 죄에 상응하여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벌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은행이 존재한다. 이른바 장발장은행이다.
출처: 장발장은행 홈페이지
장발장은행은 2015년 인권연대가 설립한 은행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벌금을 낼 수 없는 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신용을 불문하고 무담보 및 무이자로 벌금을 빌려주고 있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벌금형 판결을 확정받은 날로부터 한 달 내에 벌금을 완납하지 않으면 1일 이상 3년 이하의 기간동안 노역장에 유치된다. 생계가 어려운 사회적 약자에 경우, 벌금을 해당 기간 내에 납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대다수가 교도소에 가서 노역을 통해 벌금을 탕감하게 된다. 장발장은행은 이렇듯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벌금을 내지 못하고 교도소에 가야 하는 빈곤층에게 따뜻한 사회적 관심을 표하고자 만들어진 은행이다.
장발장은행의 대출 지원 대상은 소년소녀가장, 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이다. 대출 심사를 거쳐 최대 300만 원까지 대출해주고 있으며 그 기간은 6개월 거치, 1년간 균등 상환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형편에 따라 상환 금액도 조정이 가능하고 이미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도 장발장은행을 통해 벌금 납부가 가능하다.
장발장은행으로 본 현행 벌금형 제도
장발장은행에서 대출받기 위해선 중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생활형 범죄로 경범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범죄와 같은 중범죄의 경우는 신청자가 저소득층이더라도 대출 심사에 오르지 못한다. 장발장은행에 주로 신청이 들어오는 사례는 생계형 범죄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받은 경우이다.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대부분이 빈곤층에 속하기 때문에 벌금을 낼 자금이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5월,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던 한 80대 독거노인이 주택가에 버려진 폐지를 주웠다가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감자 5개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법원으로부터 절도죄로 인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10년 전 연락이 끊긴 부인과 자녀들의 소득이 잡힌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분류되지 않았고 매달 받는 기초노령연금 30만 원으로 생활 중이었다. 결국, 50만 원을 내지 못하고 그 당시 지명수배를 받아야 했다. 또한, 2018년도엔 700원짜리 라면을 사서 집에 돌아가던 오 모씨가 길에 떨어져 있던 체크카드로 쌀과 햄 한 통, 두부 한모 등 총 4만 4940원을 계산했다가 법원으로부터 벌금 25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했었지만 1년 전 다리를 다친 뒤 일을 하지 못했고 기초생활수급비 50만 원 중 40만 원을 월세로 내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결국, 벌금을 내지 못하다가 이후 장발장은행을 통해 벌금을 완납해야 했다.
출처: 서울신문
이러한 생계형 범죄와 같은 경범죄 처벌에 있어 징역형이 아닌 벌금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가벼운 죄로 인해 사람들이 교도소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본래 취지와 어긋나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벌금을 낼 수 없어 교도소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장발장은행 최정학 대출 심사위원은 “부자들에게 벌금형은 선처지만 벌금 100만 원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 노역을 지는 사람들에게는 가중 처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피고인의 재산 수준을 고려해 1일당 벌금액을 산정하여 형을 부과하는 일수 벌금제를 주장하며 현행 벌금형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현재 우리는 죄에 따라 벌금액을 산정하는 총액 벌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총액 벌금제는 동일 범죄에 같은 벌금형을 선고받아도 피고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형의 경중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대안으로 독일, 핀란드 등 유럽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수 벌금제의 도입을 과거부터 논의해왔지만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재산의 범위를 어디까지 한정할 것이며, 모든 국민의 개인 자산 정보를 법원 또는 검찰 측에서 보관 및 조사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침해와 똑같은 죄를 범하였어도 재산을 이유로 서로 다른 형벌을 받는 것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오랜 기간 총액 벌금제를 취해왔던 형사 체제에 있어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섣불리 이뤄지기 쉽지 않으며 논의하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 여전히 일수 벌금제의 실행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장발장은행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합리적인 벌금형 제도를 위하여
사회적으로 일수 벌금제의 도입이 어려움에 따라 현재 시행되고 있는 총액 벌금제의 개선 필요성이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최대한 피고인이 벌금을 내지 못해서 노역장에 유치되는 경우를 줄이고자 벌금 분할납부를 일정한 조건 (국민기초생활 대상자, 장애인 등) 아래 허가받을 수 있게 해주고, 벌금액이 500만 원 이하인 자에 한하여 사회봉사로 대체하거나 집행유예 선고를 늘리는 등 많은 개선이 이뤄졌다. 하지만, 분할납부에 경우 그 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까지만 가능하고, 사회봉사는 검사의 청구와 법원의 허가를 통해야만 할 수 있으며 평일 주간1일 9시간으로 생업이 있는 피고인은 사회봉사를 하는 동안 출근할 수 없는 등 일정한 한계가 아직 남아있다.
장발장은행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제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역할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 중에서 경제적 이유로 교도소에 가는 일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만 운영하고 폐점하는 것이 장발장은행의 최종 목표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죄를 범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현재 벌금형 제도가 집행과정에 있어 일정한 불합리함을 내포하고 있고 이에 공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더 나은 제도를 위해 여러 다양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져야 함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생계형 범죄의 경우, 정부의 복지정책, 경제적 자립 지원 등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빈곤층의 범죄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이에 따른 벌금형 선고와 미납으로 인한 노역장 유치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벌금형 제도는 과연 무엇이고 경제적 취약계층을 위한 제도적 개선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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